무령왕릉 발굴 50주년 전시회


어제 오랫만에 독서모임을 재개했다.

3/6까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전시했었던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전시회를 주제로 간단한 발표를 했다.

  • 1971.07.05 우연하게 발견된 무령왕릉
  • 이틀만에 유물을 반출한 졸속 발굴 비사
  • 일제강점기 시절 공주 지역 1000여기를 도굴한 가루베 지온
  • 무령왕릉 발굴이 한국 고대사 연구에 끼친 의미
  • 역사학계에 던지는 질문 (문헌사학 VS. 실증사학 & 학문적 연구 VS. 정치적 오용)
  • 역사 유물 발굴을 통한 문화적 우위 또는 역사적 근본주의는 금물

발굴 진행사항

1971년 7월 5일 송산리고분군 6호분 빗물 배수로 공사를 하는 중에 벽돌유구를 발견되었다.

6호분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판단과 새로운 왕릉급 무덤발견 사실이 7월6일 조선일보에 일면기사가 나가고 약 300여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통제불능 상태가 되었다.

도굴의 위협이 커짐을 걱정한 발굴단의 지휘부가 7/7 긴급발굴을 결정정하여 무덤문을 열았고 장마비로 잠시 발굴을 멈췄다가 7/8 무덤 입구의 묘지석을 통해서 무령왕릉임을 선언하고 7/9 2천점이 넘는 유물을 수거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사실상 발굴이라기 보다는 도굴에 가까운 무질서한 진행이었고, 작업현장의 전문가들은 걱정과 비판을 하였으나 혼란한 작업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무령왕릉은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공주)로 수도를 옮기고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의 세 왕이 반란으로 사망하는 등 정치적으로 취약성을 보이는 중에 즉위하여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면서 남조 양나라와 외교를 하는 등 국력을 쌓아서 백제의 기틀을 다시 세운 업적이 뚜렸하다.

무령왕릉 발굴을 통해서 백제가 왜국과 양나라와 교류가 활발했음을 증명하는 것이 밝혀졌다.

무령왕릉의 관은 왜국의 금송으로 제작되었고, 무덤방은 양나라 건업에서 생산된 벽돌로 건축되었다.

이런 유물 구성을 봤을 때 백제의 외교력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고, 특히 무덤양식이 벽돌무덤(전축분)이라는 것은 상당한 문화,제도,기술적인 부분이 양나라의 영향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리고, 송산리고분 5호분, 6호분에서 보이는 사신도의 흔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의 계승에 정치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0년전 무령왕릉의 발굴은 거의 도굴에 가까운 사고였지만, 발굴된 유물과 그 후의 관리 및 연구 진행을 보면 더 많은 아쉬움과 학문적인 공백이 느껴진다.

5천점에 달하는 진품 유물의 전시를 살펴보면서, 대한민국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제부터 해야할 숙제를 인식하는 좋은 기회였다고 본다.

무령왕릉

무령왕릉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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